물방아관광지는 남한산성에 위치한 당일치기가 가능한 무료 계곡이다. 식당이나 카페를 이용하지 않아도 계곡을 즐길 수 있다. 30대 가량 주차가능한 무료 주차장과 남녀 구분이 되어있는 깨끗한 시설의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다. 음료와 아이스크림같은 군것질부터 국수, 두부김치, 도토리묵 등의 식사까지 가능한 매점도 있다. 폭이 많이 넓지 않고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 놀기에 적당하며, 물살이 세지 않고 수심이 군데군데 달라 선택해서 놀 수도 있다. 캠핑용 의자나 텐트 사용도 가능하며 간단하게 돗자리를 펴고 망중한을 즐길 수도 있다. 근처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이 있으며 여행길에 잠시 쉬다가기 좋은 유명한 카페와 베이커리가 있다.
장경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남한산성 내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남한산성이 만들어지던 때 같이 세워졌다.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한 승군[僧軍 ; 전쟁과 같은 나라의 위기 때 만들어지는 승려로 구성된 군대]은 전쟁 후에도 국가의 필요에 따라 여러 일을 맡았다. 남한산성 역시 당시 북쪽에서 새롭게 힘을 키우던 후금[後金]을 대비하여 벽암 각성스님을 책임자로 하여 승군을 동원해 서울의 남쪽에 새로 쌓은 대규모 산성이다. 이때 전국에서 올라온 승군이 머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이전부터 있던 망월사와 옥정사 외에 산성 안에 7개의 사찰을 함께 세우게 되는데, 장경사도 이 중 하나이다. 승군은 공사가 끝난 후에도 산성을 관리하고 지키는 역할을 맡게 되어 9개 사찰에 머물면서 승려이자 군인으로 생활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될 때 남한산성의 군사시설과 함께 승군의 주둔지인 사찰도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장경사는 이를 피한 유일한 사찰이었다. 1975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복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장경사는 남한산성 동문인 좌익문에서 북쪽방향 망월봉 중간쯤 되는 곳에 위치하여, 산성의 제1암문을 통해서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 사찰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을 중심으로 승려가 머무르며 생활하는 공간인 요사와 문루인 진남루, 작은 불전인 칠성각이 남아 있다. 승군이 주둔하였던 곳이기에 예불을 드리는 불전보다 요사의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홈페이지)
지수당은 1672년(현종 13)에 이세화(李世華)가 지은 정자(亭子)이다. 지수당이라는 이름은 ‘군자는 백성들을 잘 포용하여 잘 살도록 길러 나간다’는 뜻을 담고 있다. 건립 당시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앞뒤에 3개의 연못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2개만 남아 있다. 정자의 동쪽에는 부윤 이세화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제3 연못지로 추정되는 지역은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건물이지만, 옆면의 1칸이 반 칸 크기여서 전체모양은 앞면이 옆면보다 넓은 장방형 형태를 띠고 있다. 건물은 4면이 모두 개방되어 밖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과거 한양을 지키던 4대 요새 중 하나인 남한산성을 품은, 남한산성도립공원이 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져 있는 남한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길이는 총 12.4km(본성 8.9km, 외성 3.2km, 신남 산성 0.2km), 높이는 7.3m이다. 원래 2천여 년 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의 시조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옛 터를 활용하여 후대에도 여러 번 고쳐 쌓다가, 조선조 광해군 때(1621) 본격적으로 축성하였다 한다.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 돌을 위로 쌓았다. 동서남북에 각각 4개의 문과 문루, 16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 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과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은 상궐 73칸, 하궐 154칸, 좌전 26칸으로, 모두 252칸을 지었다. 80개의 우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 안으로 옮겼다. 이쯤 되면 남한산성의 중요성과 성안이 유치 가능 인구도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산성이 축조되고 처음으로 시행(인조 17년, 1639)된 기동 훈련에 참가한 인원만 해도 12,700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내에 남아 있는 건물은 불과 몇 안 된다. 동·남문과 서장대, 현절사, 연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숭렬전 이서 장군사당, 보, 루, 돈대 등이 남아있다. 그중 4대 문과 수어장대, 서문 중간쯤의 일부 성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적과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한산성 전통음식마을은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로 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인근에 조성된 전통 음식 거리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민족사의 주요 군사요충지인 남한산성은 조선 선조에서 순조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보루로 제16대 인조 때 완공되어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속하는 만큼 볼 것이 풍부하며 남한산성 주변에는 한국의 전통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통 가옥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전통 한옥으로 지은 70여 개의 음식이 한곳에 모여 있는 이곳은 쌀밥, 도토리묵, 토종닭, 닭볶음탕 등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 한옥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며 한정식을 즐길 수 있으며, 사계절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아 여행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망월사는 남한산성 내 가장 오래된 고찰이다. 다른 사찰이 조선 인조 때 남한산성을 축조하면서 건립한 것과 달리,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한양의 장의사를 허물고 그곳의 불상과 금자화엄경[金字華嚴經], 그리고 금정(금솥) 1좌를 이곳으로 옮겨 화엄종 사찰로 창건했다. 넓은 대지에 창건됐던 망월사는 임진왜란 이후 승병대장의 지휘소 역할을 했는데, 군사적·역사적 중요성으로 인해 오히려 197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되는 아픔을 겪었다.
남한산성 내에는 행궁, 사장대와 9개 사찰이 있었다. 망월사는 산성의 승병을 관할하던 절이었다. 국가와 산성을 수호하던 9개 사찰은 일본군에 의해 화약과 무기가 많다는 이유로 1907년 8월에 장경사 요사채 일부만을 남겨두고 모두 전소되었다.
1981년 성법스님이 인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기증받고 모실 곳을 찾던 중 망월사에 인연이 닿았다. ‘이곳에 부처님 사리를 모셔야겠다.’라는 발원으로 각종 규제로 묶인 개발제한구역에서 사리를 모시기 위한 성법스님의 구법행이 담긴 사찰이 망월사이다.
망월사는 산성 동문에서 북으로 난 길을 따라 200m 정도 올라가다가 장경사와 갈라지는데 길 왼편에 위치하고 있다. 1984년 동국대 발굴조사단장인 문명대 교수가 발굴을 시작했으며, 1990년 조사보고서를 발행하고 본격적인 복원불사를 시작했다.
경기도 기념물 제111호로 지정된 망월사는 높게 쌓아 올린 석축 위로 대웅보전, 극락보전이 나란히 서 있는 고려시대 양식이다. 어느 곳에서나 아름다운 자연석으로 쌓은 석축을 만날 수 있는데, 이 돌은 사찰터에 흩어져 있던 것이다. 당시 사찰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대웅보전 후불탱화와 신중단은 화려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양각 양식의 불보살님이 조각되어 있다. 또 대웅보전 오른편으로 넓은 창문이 있어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석탑을 보며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했다. 불사리탑은 인도 간디수상으로부터 성법스님이 직접 전해받은 부처님 사리를 모셨는데, 13층의 다각다층석탑으로 월정사 석탑의 양식을 따왔다.
산신각도 특이하다. 대웅보전 뒤편 길을 따라 오르면 나오는 산신각은 자연동굴에 호랑이를 타고 있는 산신할아버지를 조각해 모셨다. 화려한 단청을 자랑하는 범종각도 세월을 머금으며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남한산성을 찾는 사람이면 꼭 둘러봐야 할 곳이 망월사이다. 남한산성의 사찰 가운데 현재 4곳이 복원되어 있는데, 망월사는 인근에 있으면서도 가람배치나 건축양식이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산세에 따른 가람배치 형태가 다르기 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