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오감통은 음악창작소, 먹거리 장터, 한정식 체험관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문화공간이다. 화려한 공연, 눈과 입이 즐거운 산해진미, 특별한 재미가 넘치는 체험거리, 친환경 로컬푸드 등을 즐길 수 있다. 전남음악창작소는 지역 뮤지션들의 창작활동을 지원하고 더불어 지역의 대중음악 소비자층을 확대하기 위해 지역 뮤지션과 지역 주민들을 위한 진정한 열린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영랑 김윤식 선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김종호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에는 채준으로 불렀으나 윤식으로 개명하였으며 영랑은 아호인데 문단활동시에는 주로 이 아호를 사용했다. 영랑 선생은 1950년 9월 29일 작고하기까지 주옥같은 시 80여편을 발표하였는데 그중 60여편이 광복전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이곳에서 생활하던 시기에 쓴 작품이다. 영랑생가는 1948년 영랑이 서울로 이거한 후 몇 차례 전매 되었으나 1985년 강진군에서 매입하여 관리해 오고 있는데 안채는 일부 변형 되었던 것을 1992년에 원형으로 보수하였고, 문간채는 철거 되었던 것을 영랑 가족들의 고증을 얻어 1993년에 복원하였다. 생가에는 시의 소재가 되었던 샘, 동백나무, 장독대, 감나무 등이 남아 있으며 모란이 많이 심어져 있다.
사의재(四宜齋)는 다산 정약용이 1801년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묵은 곳이다. 사의재는 이곳 주막집(동문매반가)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다잡아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으로 ‘네 가지를 올바로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다산은 생각과 용모와 언어와 행동, 이 네 가지를 바로 하도록 자신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생각을 맑게 하되 더욱 맑게, 용모를 단정히 하되 더욱 단정히, 말을 적게 하되 더욱 적게, 행동을 무겁게 하되 더욱 무겁게’ 할 것을 스스로 주문하였다.
사의재는 창조와 희망의 공간이다. 사려 깊은 주막 할머니의 ‘어찌 그냥 헛되이 사시려 하는가? 제자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얘기에 자신 스스로 편찬한 「아학편」을 주 교재로 교육을 베풀고, 「경세유표」와 「애절양」 등을 이곳에서 집필하였다. 다산은 주막 할머니와 그 외동딸의 보살핌을 받으며 1801년 겨울부터 1805년 겨울까지 이곳에 머물렀다.
강진군은 오랜 고증을 거쳐 동문 안쪽 우물가 주막터를 원형 그대로 2007년에 복원하였다. 현재는 동문매반가(주막)와 한옥체험관을 운영 중에 있다.
남강서원은 남강사라고도한다. 조선 중기의 문신 우암 송시열(1607~1689)과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자(1130~1200), 송시열의 문인인 손재 박광일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남강서원의 유래는 송시열이 기사환국으로 인해 숙종 15년(1689)에 제주도로 유배 가게 되었는데 그때 강진의 성자포(현 남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를 타려다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잠시 근처의 만덕산 백련사에 머물며 유생들에게 강론을 하였다고 한다. 그를 기념하기 위해 순조 3년(1803)에 세운 것이 바로 남강서원이다.
당시 강진의 향유들이 도관찰사였던 한용구의 승인을 얻어 정읍 노암서원에 모셔져 있던 송시열의 영정을 백련사로 옮겨 봉안하고, 영당의 액호를 남강이라 하였는데 백련사의 영당이 남강서원의 전신이다. 헌종 4년(1838) 향림들의 발의로 사당에 주자를 정위봉향 하였으며, 1901년 현재의 위치에 신단을 설단 하여 주자와 송시열을 향사하는 한편 어필각을 건립하였고, 후에 박광일을 추배 하였다.
남강서원 왼편에 구 어필각이 있고, 그 앞으로 새로운 어필각이 신축되었다. 어필각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유산인 강진남강사주자갈필목판일괄이 소장되어 있다. 주자갈필목판은 순조 9년(1809)에 송시열이 제주로 유배 갈 때 배를 탔었던 성자포 앞바다로 떠내려 온 궤 안에 있던 것이라 한다. 당시 강진 현감이 이 궤를 감영으로 옮기려 했으나 궤를 수송하던 사람과 말이 남강사(남강서원) 앞에서 전복하여 더 이상 옮길 수 없게 되자 그 목판을 서원에 소장하게 된 것이라 한다.
강진향교의 확실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윤탁이 대성전에 은행나무를 심도록 권장하였다는 기록과 현재의 은행나무 나이를 짐작하여 조선 전기인 1400년대로 추정된다. 강진향교 역시 다른 건물과 같이 임진왜란의 병화를 입었으며, 광해군 5년(1613)에 이 지역출신 입방자들이 의금을 내고 군수 정인의 도움을 받아 사마재를 건립하였고, 그 후 1675년에 본격적으로 향교를 건립하였다. 1858년에는 군수 심의찬이 향교를 중수, 1901년과 1919년에는 대성전을 중수, 1935년에 명륜당을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동재, 서재, 명륜당 등이 있다. 앞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배움의 공간을 두고, 뒤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제사공간을 두고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 안에는 5성, 송조 4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대성전의 좌측에는 수령 약 400년 된 은행목이 한 그루 있으며, 대성전에 들어가는 협문이 좌우에 있다. 건축 형식을 보면 대성전은 정면과 측면이 모두 3칸이며, 지붕은 겹처마로 맞배지붕이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붕은 홑처마의 팔작지붕이다.
봄과 가을에 석전을 봉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 1명과 장의수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